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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돌라미 2023. 6. 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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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Pablo Ruiz Picasso

 

(풀네임 :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Crispín Crispiniano María Remedios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Picasso)

 

 

출생: 1881년 10월 25일 ~ 1973년 4월 8일

 

출생지 :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말라가(Málaga)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19~20세기 동안 활동한 미술가로서 바르셀로나에는 피카소 작품들만 모아논 피카소 미술관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긴  미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각 작품은 약 1200여 점과 도자기 2800여 점, 1만여 점이 넘는 그림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모든 작품을 합치면 피카소의 작품 수는 최소 30000여 점가량 된다고 합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 (Museu picasso de barcelona) 외부
여긴 내부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의 남부 도시인 말라가에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 José Ruiz Blasco )라는 화가와  마리아 피카소 이 로페즈(María Picasso y López) 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태어날 때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이름은 파블로 블라스코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친이 화가라서 파블로 피카소는 미술을 상당히 어린나이에 접하게 됩니다.  7살때는 아버지로부터 유화와 인물화 그리는 법을 가르치더니, 그가 예술에 소절이 있고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피카소 아버지는 1891년 갈리시아 라 코루냐 지방의 미술교사로 취직했을 때, 피카소를 Guarda 미술학교에 입학시키고  1895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사 갔을 때에는 피카소를 La Lonja라는 미술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1889년에 찍힌 유년시절의 피카소, 오른쪽 여자 아이는 피카소의 여동생 Lola

 

피카소가 9살때 그린 첫 작품이자 유화직품. 투우사(El picador - 1890)

 

남자 상체(Plaster male torso - 1893) 이미 10대 초반에 피키소는 사실주의 기법에 통달했다는 걸 보여준다.

 

 

피카소가 16살이 되던 1897년,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학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등록을 시키지만, 피카소는 얼마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적응 문제).피카소는 대신 아카데미로 수업받으러 가는 대신 밖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열린 미술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해서  대상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다가, 1898년 건강의 문제로 마드리드에서 카탈루냐의 오르타 데 에브로 마을(Orta de Ebro)에서 지내게 됩니다.

 

1896년에 그린 피카소의 자화상. 15살 떄 그린 작품이다.

 

첫 영성체 (Primera comunión -1896)  제3회 예술 및 예술 산업 전시회에서 이 작품은 극찬을 받게 된다. 성찬식을 받는 여성의 모델은 피카소의 여동생이지만, 여동생은 2년전 급성 호흡기 감염(디프테리아)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말라가 미술 전시회애서 대상을 받은 작품 '과학과 자선(Ciencia y caridad - 1897)

 

어떤 남자의 두상(Cabeza de hombre -  1899) 피카소는 스페인의 3대화가 엘 그레코를 존경했기에 엘 그레코의 스타일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1899년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엘 콰트레 개츠(El Quatre Gats)라는 카페에서 예술가들과 모더니즘 시인, 작가 지식인들의 무리와 어울다녔는데,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피카소의 예술적 발전에 큰 기여를 밖에 됐다고 합니다. 

 1900년대에 자신의 전시회를 열어서 50여개의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12월에 파리 박람회에 참여하고자 프랑스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죽은 여동생을 상상하면서 그린 초상화 죄 1899 / 우 189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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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개인전을 위해서 다시 스페인이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파블로 피카소'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때 피카소가 보여준 많은 작품에는 균일한 파란색  색상 덕분에 1901년부터 1904년에 파리에서 거주하기 전의 기간 동안 보여준 작품들을 청색시대(blue period) 작품라고 합니다. 이 기간 당시 주로 여성과 거지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피키소가 이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로 1901년에 친구였던 찰스 카사지마스(Charles Casagemas)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시작된걸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때 피카소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왕복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성(Maternidad -1901)

 

담배를 피우는 여인 mujer joven tenencia, un cigarrillo - 1901

 

 

Riera de Sant Joan의 새벽 (1903)

 

청색시대에 피카소의 명작 중 하나 수프(La sopa - 1903) 이 그림은 현재 캐나다에 있다. 이 그림은스페인에서 어린 시절 그를 둘러싼 종교적인 그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0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파리에 거주하면서 기존에 겪고 있던 우울증을 극복하게 됐고 색채를 기존의 파란색에서 그의 붉은색과 분홍색 톤 따뜻한지 색깔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1904 ~ 1906년까지 약 3년간 그린 작품들을 장미시대(Rose period)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서커스 사람들과 삐레오(harlequins )을 주요 대상으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그는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에 있었던 만큼 그림에도 프랑스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게 보입니다.

1905년부터 미국인 었던 오와 거트루드 스타인(Leo and Gertrude Stein) 이 피카소를 후원하고 그의 작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피카소의 그림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피카소의 나이 24살 때의 일입니다.

 

파이프를 든 소년(un chico con pipa -1905) 이 작품은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마지막 거래가 2004년 5월에 1억달러가 넘는 가녁에 낙찰 되었다고 한디

 

스카프를 쓰고 있는 Fernande Olivier의 초상화. 이 여자는 피카소의 여자친구이다.1911년에 결별했다.

 

피카소의 후원자였던 Gertrude Stein의 초상화 1906

 

 

풍차가 그려진 네덜란드 풍경 (1905) 1905년에 네덜란드를 잠시 여행했다.

 

개인 초상화 (1906)

 

 

 

 1907년경부터 피카소는 고흐와 폴세잔이라는 화가로부터 고대, 부족 예술에 대한 인상파적 영향을 받는데, 이는 피카소가 입체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907년부터  많은 작품들의 사람이나 물체가 각진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때부터  피카소가 입체파 예술 작품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1907년~1909년 이 3년을 당시 아프리카 예술에 영향을 받은 시기라도 고 하여 아프리카 시대(African perio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시기 때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인 '아비뇽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잃어버린 이베리아 석두 조각상을 우연히 획득해서 절도범으로 몰리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amoiseles d'Avignon 1907) 당시 아비뇽에 있던 매춘부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라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여성 편력이 있었던 피카소는 이미 이전에도 일반여성, 댄서, 매춘부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런 적이 많다. 이전에는 전혀 없던 화풍이기에 20세기 예술의 방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우정(Amistad 1908)

 

 

팔짱 낀 남자(Hombre con los brazos cruzados 1909)

 

병에 담겨있는 과일들(Fruta en un Florero 1909)

 

 

 

 

 1909년부터 12년까지 본격적인 피카소의 입체파(= 큐비즘 Cubism)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 3년의 피카소 화가 생활을  분석적 입체파(Analytic Cubism)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입체파는 1912년 이후 합성 입체파(Synthetic Cubism)라는 새로운 미술계의 진화로 이어졌는데, 1909년부터 이 3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와 그의 동료 화가 브라크(Braques)는 입체파 양식을 표현하는데 대부분 중립적인 음색을 사용했고 항목을 분리하고 형식적으로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분석적 입체파는  2차원 그림 평면에서 3차원 형태의 단편화로 표현하는 방법에 비해,  합성 입체파 시대 때는 신문지와 색종이를 캔버스에 붙이면서 작품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붙이는 걸 넘어서서 합성 입체파 때는 입체파 작품에 옷감과 같은 촉각 성분을 포함시켰고, 때때로 나무의 알갱이와 같은 실제 물체와 질감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트롬페로유 효과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입체파 작품들은 일반적인 이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1916년까지 전시되지 않았습니다.

입체파 그림들은 단지 기하학적인 예술로 여겨졌기 때문에 비평가들과 대중들에 의해 종종 무시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타리스트(Guitarrista 1910)

 

 

앉아 있는 누드의 여성 (Desnudo femenino sentado 1910)

 

 

클라리넷과 바이올린(Clarinete y violín 1913)

 

담배피는 학생 (Estudiante con pipa 1914)

 

 

 

1914년, 전쟁이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동안, 피카소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915년도에는 그의 여자친구가 에비가 건강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됐고. 1917년에는 음악가 콕트(Cocteau)와 로마랑 여행을 갔다가  올가 호크로버라(Olga Khokhlova)라는 발레리나를 만나게 되면서 1918년에 혼인을 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질서로의 복귀(과거 화풍으로)"를 원하는 운동이 있었고 피카소 역시 이 운동에 편승하였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고전주의와 지중해주의(Mediterraneanism)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는 그의 그림 스타일이 전통적인 형태와 전통적인 그림 기술을 다시 사용하게 됨을 뜻합니다.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이러한 신고전형태의 그림풍을 유지합니다.

 

(Curtain for the ballet Parade 1917) 그림을 보면 알다시피, 이전에 피카소 스타일은 사라지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림처럼 보인다

 

만틸야를 쓴 올가 호클로바라(Olga Khokhlova con mantilla 1918) 피카소의 부인

 

 

Penthieure 거리로 열린 창문(Ventana abierta a la calle Penthieure 1920) 피카소가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전에 그렸던 입체파 작품들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엄마와 아이 (Madre y hijo 1921)

 

 

올가(Olga 1923)

 

 

 

1925년에 들어서면서 피카소는 초현실주의라는 철학적, 문화적인 움직임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시작됩니다. 초현실주의의 피카소 작품은 이전 입체파 작품에 비해 더 격렬하게 표현되고 변형된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초현실주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게르니카(Guernica ), 꿈(A dream) 등이 있습니다. 

 

화가와 모델 (Pintor y su modelo 1928)

 

 

꿈(A dream 1931)

 

 

우는 여자(mujer llorando 1937)

 

게르니카 (Guernica). 크기는 가로 7.76m / 세로 3.49m 나 되는 거대한 작품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전시를 위해 스페인 제2 공화국으로 부터 의뢰받은 작품으로, 1937년 4월26일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는 독일 폭격기들이 바스크의 마을 게르니카에 파괴적인 공중 공격을 감행한 후, 폭격과 전쟁의 비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은 현재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중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쳐서 2차 세계대전 상태에 이르자 그는 더더욱 명백한 초현실주의자가 되어갔습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는 그림활동을 제대로 하질 못했습니다.. 이미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승리 이후 게르니까 때문에 프랑코에게 찍힌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망명하여 프랑스로 온 상태라 스페인으로 돌아가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피카소는 이때부터 도자기 예술에 몰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그의 작품을은 정치적이면서 인문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그리기 시작했으며 2차대전부터 했던 도자기 예술은 새로운 석판화 기법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카소가 공산당에 들어간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930년대 중후반에부터 이어져오던 파시즘의 탄압에 대한 저항의 의지로 추측됩니다.)

 

 

Dora Maar의 초상화 (Portrait of woman. Dora Maar 1942) 도라마르는 당시 피카소의 여자친구였다

 

피카소(좌)와 그의 여자친구 도라 마르(Dora Maar)(우)

 

서 있는 여자 (Standing woman 1946)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1951). 게르니카에 이어서 피카소의 반전성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피카소는 전시회나 회고록을 여는 등의 예술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동안 도쿄, 로마, 밀라노  런던, 베니스, 파리에서 회고전과 전시회를 열었고, 1957년 뉴욕에서 열린 회고전은 1달에 10만 명이 넘게 다녀갈 정도로 성행했고, 박물관 측이나 개인 수집가들이 물관과 개인 수집가들이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피카소의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 파블로 피카소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니콜라스 푸신, 그리고 엘 그레코와 같은 예술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의 복제품에 집중했습니다. 피카소는 1961년 본인의 스타덤을 이용해서 재클린 로그라는 여자와 재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줄곧 작품활동에 몰두하다가 1973년 프랑스 남부에서  심부전과 폐부종 때문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스튜디오에 있는 여자 (Woman in the studio 1956)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 (Woman sitting in an armchair 1962)

 

 

 

예술가(An artist 1967)

 

여성 흉상(Bust of woman 1971)

 

 

 

 

 

파블로 피카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화가일 뿐만 아니라 조각가, 판화가, 도예가, 극장 디자이너이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그의 일생 동안 많은 다른 예술적 매개체에서 그의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즐겼고, 적절한 시기에, 각 매개체에서 거장이 되었습니다. 피카소의 도자기에서부터 그림, 석판화, 에칭, 그리고 리노컷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의 예술적 기술을 우리에게 쉽게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법입니다."

(He can who thinks he can, and he can't who thinks he can't. This is an inexorable, indisputable law)

 

 

 


"행동은 모든 성공의 기본 열쇠입니다."

(Action is the foundational key to all suc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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