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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스페인 3대 화가 중 하나,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de Goya)

돌라미 2023. 4. 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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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출생: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

 

출생지 :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Fuendetodos)

 

 

 

 

 

 

고야는 이미 스페인의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써 잘 알려진 화가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활동한 예술가입니다.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권으로 가면 고야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으며, 프라도 박물관 앞에서는 고야 동상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프라도 박물관 앞에 있는 고야 동상

 

 

 

1746년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사라고사 zaragoza 인근 소도시)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고야는 10대 시절 가족과 함께 사라고사로 넘어가서 14살 때 호세 루잔 마르티네스(Jose  Luzan Martínez)이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어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4년 동안 도제로 일하면서 이후 같은 호세 루잔 도제이자 미래의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유(Francisco Bayeu)와 친분을 만들어서, 1763년에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이사가게 됩니다

 

 

공개된 작품 중 고야의 첫 작품 1767년에 완성했다  체스킬레체의 난 "The Esquilache Riots"

 

 

 

고야는 1763년에 마드리드에 들어와서 프란시스코 바이유 밑에서 일을 하면서, 미술 대회 입장을 노려보지만, 벨라스 아르테스 산 페르난도(Bellas Artes de San Fernando) 아카데미에 주최하는 2차례의 미술대회에 입상에는 실패하게 되어 1770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난잡한 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지만, 미술 공부를 하면서 파르마 아카데미(Academy of Parma)에서 주최한 미술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본인이 고대하던 입상을 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유학 때 미술 대회에서 2위를 수상한 작품 '한니발(Aníbal)' 1771

 

 

 

고야는 1771년에 사라고사로 돌아와서, 수도원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장식을 맡으면서 역시 사라고사에 돌아온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도제로써 미술공부를 이어가게 됩니다.  1773년에는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고 1775년경부터 산타바바라(Santa Bàrbara) 스페인 왕궁에 보낼 테피스트리(tapestry) 삽화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고야가 디자안 한 테피스트리는 엘 에스코리알 같은 왕실 직속의 건물에 납품이 됩니다. 

 

이렇게 두꺼운 천 위에 수를 놓아서 만든 장식을 테피스트리(tapestry) 라고 합니다. 사진은 마드리드 왕궁에서 찍은 것, 벽이나 창문에 설치하여 겨울 같은 날에 방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야는 자신만의 로로코 양식의 테피스트리(tapestry) 삽화 제작으로 인지도를 쌓다가 고야는 1780년에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Royal Academy of San Fernando)으로 선출되었다가  1785년 아카데미의 부원장으로 임명되더니 1786년에 스페인 왕실 화가로 임명됩니다. 

 

고야는 테피스트리 삽화를 하면서도 틈틈히 그림을 그렸다. 왕실 화가가 될때까지 50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사냥파티(Hunting Party, 1775)

 

 

 

열매따는 아이들(Boys picking fruit,1778)

 

 

 

 

그네(the swing, 1779)

 

 

 

 

오수나 공작과 그의 가족들(The Duke and Duchess of Osuna and their Children 1788) 고야는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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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792년 고야의 인생에 있어서 갑작스러운 터닝포인터가 발생합니다. 왕실 화가로써 꽤 높은 수입을 벌고 있던 46세에 청력장애를 앓기 시작한 건데요.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으나 학계에서는 뇌졸중 증상, 뇌염, 납 중독, 매독 등의 다양한 추축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병에 대한 우울증 때문에 고야의 작품은 어둡게 변해갔는데요. 이때 학계에서는 로코코 스타일의 화풍이 표현주의적으로 변환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795년,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감독으로 임명되고, 1799년 10월 31일에는 궁정화가 중에서도 최고 자리인 선임 궁정화가로 임명이 됩니다

 

고야 본인의 초상화 (Self-portrait,1795) 이때부터 우리가 알던 고야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나타난다.

 

 

 

 1801년 이후 고야는 높은 연봉을 계속 받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위임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19세기 초, 고야는 주로 작위나 계급이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 이미지를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그는 또한 계급이나 계층등을 따지지 않고 없이 대상이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친밀하고 심리적으로 심오한 초상화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의 정치가/철하자 Gaspar Melchor de Jovellanos의 초상화(1798)

 

 

 

 

카를 4세와 그의 가족들( The Family of Carlos IV, 1800)

 

 

 

 

1800년에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 벌거벗은 마하(The Naked Maja, 1800) 고야가 이 초상화를 그릴 떄, 실제 여성을 모델로 두고 그렸다고 한데, 여신이나 성경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이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모자이크처리를 한 했으니, 원본은 구글에 직접 검색해 보시는걸 추천합니다. 이 작품때문에 1816년 종교재판을 받게됩니다.

 

 

 

아래 사진은 옷을 입은 마하 (La Maja vestida, 1805) 모델 마하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당시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드 고도이(Manuel de Godoy)의 부인 페피타 투도(Pepita Tudo)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1800년대는 스페인의 역사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카를로스 4세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 여러 혼란이 일어났던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1804년에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프랑스로부터 스페인의 간섭이 많아 불만이 가득했던 판인데, 나폴레옹이 총통으로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스페인 내정에 간섭하더니, 스페인을 쉽게 통치하도록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친형 조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의 국왕을 임명해 버립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1808년부터 스페인 독립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808년 5월 2일(The Second of May, 1808 , 1814) 스페인사람들과 프랑스 군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1808년 5월 3일, The Third of May, 1808, 1814)  스페인 독립전쟁 초기,민간인들이 프랑스군에 즉결 처형당하고 있다. 고야의 명작 중 하나

 

 

 

고야는 프랑스가 스페인을 지배할 동안(1808~1814) 왕실화가로는 임명받지 못하지만. 1811년 나폴레옹이 왕으로 세운 조셉 보나파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프랑스 정권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본인 생계를 유지합니다. 실제로 고야는 스페인 총리이지만 친프랑스 파였던 고도이 총리와 꽤 이랬던 한  1814년 나폴레옹이 유배당하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됐는데, 고야는 1808년 5월 2일/3일을 그린 공적(?) 덕분에 프랑스에 충성한 지난 과거는 사면됩니다. 

 

하지만 왕이 된 페르디난트 7세는 이전 왕들에 에 비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고야의 삶과 억압했습니다. 하나의 예시로, 앞서 보여준 작품 중 벌거벗은 마하/옷 입은 마하는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재판을 받을 받고 두 그림 다 압수를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왕실 화가 대우도 이전 왕들에 비해서 별로였다는 말도 있고요.

 

페르디난트 7세의 자화상 (Ferdinand VII in Court Dress, 1815)  고야는 1년동안 페르디난트 7세의 자화상을 6점이나 그려야 했다.

 

 

 

 

성 후스타와 루피나(Saints Justa and Rufina. 1817)

 

 

 

고야는 건강악화로 인해 왕실 화가 생활을 몇 년 하지 못하고 관두게 됩니다. 1819년 고야의 증상은 청력 상실뿐만 아니라 우울증, 환각, 마비등의 다양한 증상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작은 집을 구매하여 그곳에서 벽에 그림 지내면서 지내게 되는데, 이 작은 집에서 생활화면서 미술책에 나오는 검은 그림들을 그리고 됩니다. 이 검은 그림들은 고야 사후에 조심스럼 게 잘려서 캠버스에 담게 되어 스페인 정부가 기증됩니다.

 

검은 그림들 중 가장 유명한 그림 (Saturn devouring his sons,1823) 그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색체도 어둡게 변한다는게 보인다.

 

 

 

 

수프를 먹는 두 노인 (Two Old Men Eating Soup, 1823)

 

 

 

 

 

책읽는 남자들 (Men Reading, 1823)

 

 

 

 

1824년 고야는 군주제의 권위를 높이려는 스페인 왕실을 피하고자, 프랑스 보르도로 간 뒤 1828년 보르도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고야는 알지도 못하는 병 때문에 많은 순간을 병마와 싸우던 화가였습니다. 이때문에 관련된 추측과 썰이 많은 화가인데, 대표적으로 마드리드 외곽집에서 그린 검은 그림들은 생후에 공개된 그림들이라서 고야가 작품으로 그린 그림이 아닐 수 도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책이나 미술관에서 바로 위에 올린 3개의 작품을 포함한 검은 그림들은 이름들은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고야가 짓지는 않았습니다. '검은 그림'이라는 명칭도 고야가 아닌 미술사학자들이 지은 이름이니까요 당시 시대적인 지식과 기록의 부족으로 고야는 미스터리가 많은 화가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기록의 부재로 인해 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추측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현대예술의 기원은 19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지만, 일부 미술사학자는 현대 예술의 기원을 고야를 중심으로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이 보통 미술계에서 사실주의가 시작됐다고 봅니다만, 고야가 그린 작품들은 보면 주제가 "병정놀이하는 아이들" "그네" "연"처럼 아주 평범한 주제를 표현했으니까요. 종교과 관련된 그림이 손에 꼽을 정도로 그린게 적습니다. 고야의 작품들은 후대 인상주의파의 계보를 잇는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마네(manet) 초현실주의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등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유럽여행을 가게 되면 고야의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유럽 여행을 가게 되면 고야의 작품도 함께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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