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어어어 개인적으로 뻘짓한 날이었습니다.
자격증 시험 접수하고 결제까지 했는데, 웹사이트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새로고침 몇번눌렀더니
갑자기 시험 점수한게 취소(환불)되어 있었습니다
걍 어이 없어서 다시 접수를 하려고 하니까, 시험 신청은 안되고, 계속 접수 내역으로 넘어가더군요. 접수 내역은 환불한 거 밖에 없을텐데....
그래서 계정도 새로 만들어보고, 웹페이지를 크롬으로도 바꿔서 접속도 해보고 별짓거리 다해봤는데 안되더군요.
결국 하다 안되서, 그날은 포기하고 오늘 주관하는 단체에 전화해서 사정을 해보니,.환불 내역을 없애주겠다고 하여
오늘에야 다시 접수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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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산토 토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é)과 스페인의 3대화가중 한명인 엘그레코에
대해서 한번 써 볼까 합니다.
본래는 늘 하던것처럼 산토토메 성당에 대한 역사적인 서술만하려고 했지만, 산토토메 성당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어서 당황스럽더군요.....
산토 토메 성당은 앞서 포스팅한 톨레도 대성당이나 로스헤이수타스 성당에 비해서는 작은 축에 속하는 성당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의의도 깊고, 가치도 있다보니 스페인 단체 관광 패키지로도 이 성당을 방문하곤합니다.
이전 포스팅에 언급했다시피 정오 미사를 드리고 있어서 제대로 된 관람은 못했습니다 ㅠ
관람 시간:
3월 1일 ~ 10월 15일 = 오전10:00 ~ 오후6:45
10월 16일 ~ 2월 28일 = 오전10:00 – 오후17:45
폐장 10분전에는 입장이 불가합니다.
휴일1월1일, 12월 25일
단축 운영: 12월 24일과 31일은 오후 1시까지만 진행
미사시간
3월 1일 ~ 10월 15일 :12시, 오후7시30분 (일요일은 오전 9시추가)
10월 16일 ~ 2월 28일 : 12시, 오후8시 (일요일은 오전 9시추가)
입장료 3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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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6세가 이미 이슬람 세력을 마드리드로부터 축출된 때 1085년에 이 자리에는 무어인들을 위한 모스크가 있던자리입니다만, 1142년에 산토 토메 성당이 지어지면서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합니다. 이후 14세기때 오르가즈 백작때 의해 한번 재건축이 이뤄졌는데 이때는 종탑에 무하데르 양식의 디자인과 서고트식 틈새 밑 십자가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Santo Tomé | Toledo Monumental
당시 오르가즈 백작이었던 돈 곤살로 루이스(Don Gonzalo Ruiz)는 산 유스토(San Justo)와 산 바르톨로메(San Bartolomé) 교회를 재건하고 아구스티노 수녀원(agustinos) 소속의 산 에스테반(San Esteban) 건설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빈곤층 지원을 위해 재정과 가축등을 산토 토메 교회가 기부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곤살로 루이스의 재정적 공헌과 기여는 폐허였던 톨레도를 재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는 산토 토메 성당에 묻히길 희망했습니다만,
그가 사망하던 1323년에는 아직 산토 토메 성당의 재건축이 완성되지 않았던 때라, 그의 시신은 임시로 산 에스테반 교회에 묻혔다가 1327년 산토 토메 성당의 재건축이 끝났을때, 시신이 예배당으로 옮겨지면서 고인의 의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곤살로 루이스가 묻힐 때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의; 손으로 직접 백작을 직접 묻었다고 전해집니다. 몇세기 뒤 어떤 화가가 산토 토메 교회의 의뢰를 받아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장면을 그리게 되는게 그게 스페인 3대 화가 중 한명인 엘 그레코의 작품 "오르가즈 백장의 매장"입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년 10월 1일 ~1614년 4월 7일
엘 그레코가 스페인의 3대화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출생지는 그리스입니다. 엘 그레코는 이름이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어로 "그리스인"을 지칭할 때 쓰던 단어 였습니다.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Doménikos Theotokópoulos)
당시 그가 살던 곳은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엘 그레코는 자연스럽게 본인이 베네치아 인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당연히 교육도 베네치아에서 받아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당시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면서 20대의 인생을 베네치아에서 보내게 됩니다.
1577년 봄에 스페인으로 건너오게 되고 펠리페2세의 밑에서 왕궁 작업을 하려 했지만, 이는 뜻대로 되지를 못합니다. 스페인 왕궁과의 짧은 인연을 끝내고 톨레도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는 그의 반려자 제로니마(Jerónima)를 만나게 되지만 혼인은 하지 않고 동거만 같이 하게 되는데 이는 엘 그레코가 이탈리아에 있어서 결혼에 좋지 못한 기억이 있기에 동거인으로까지만 남은걸로 추측됩니다.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서 교회와 수도원들에 대한 의뢰를 통해서 그의 작품을 확장해나갑니다. 톨레도로 이주한 뒤, 그가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톨레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였던걸까요?
톨레도 대성당측에서 의뢰한 작품에서, 성당측이 요구한 금액과 엘 그레코가 요구한 금액이 첨예하게 달라 이는 소송으로 까지 이어 지게되었고, 이 때문에 엘 그레코는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어버렸고 커리어에 있어서 안좋은 한 획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후 그의 커리어가 끝날 때 까지 종교 당국에서 의뢰는 확연히 줄어버렸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주 의뢰인은 개인 아니면 도시 계약에서 많이 왔습니다.
그의 경력 후반기에, 엘 그레코는 그의 예술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형태를 거부했고, 마네이라(maneira)로 알려진 자기 의식적인 방법을 수용하여 본인의 예술에 적용시켰습니다. 이것은 로마에서 매너리즘 스타일이 거부되고 있을 때 화가가 반대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길쭉한 뒤틀림과 형태, 비현실적인 색채 등이 그의 후기 작품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영혼들이 내 머리 속에서 미친 듯이 속삭이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린다." - 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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